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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 '난수표' 투표용지 해독법

투표는 어렵다.   우편투표 용지를 받으면 어려움의 정도는 그 두께로 가늠한다. 다음달 7일 치러지는 올해 예비선거 역시 두툼했다.     뜯어보니 읽기 전부터 지친다. 내가 사는 LA시 13지구 유권자 집에 배달된 우편투표 용지는 8페이지다. A4 용지보다 30%쯤 더 긴 종이 앞뒷면에 글이 빼곡하다. 벌써부터 올라오는 피로감을 꾹 참고 한 장씩 넘겨본다. '기자가 투표 용지 한번 안 읽어봐서 되겠나.'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투표는 더 어려워진다. 뽑아야 할 선출직은 30개고, 용지에 적힌 후보자수는 무려 191명에 달한다.   연방 상.하원에 각 1명씩을 시작으로 LA시 선출직은 시장, 시검사장, 회계감사관, 시의원, 교육위원 등 5명에 표를 줘야한다. 또 LA카운티는 수퍼바이저, 셰리프국장, 조세사정관, 판사 9명 등 12명을 투표해야 한다. 캘리포니아주 선출직으로는 주지사를 비롯해 11명을 뽑아야 한다.   투표의 첫 난관은 직책명의 이해다. 보험국장, 조세형평국위원, 총무처장관 등등 당최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모른다. 구글로 찾아봤다. 역할이 뭔지 알아야 적임자를 고를 것 아닌가.   대충이나마 감을 얻고 투표할 후보 명단을 봤다. 더 낭패다. 아는 이름이 없다. 용지에 적힌 후보 정보라고는 소속 정당과 직업 딱 2가지다. 말했다시피 용지에 인쇄된 전체 후보는 191명이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만 26명이고, 연방 상원의원에도 23명이나 출마했다. 모든 후보의 정보를 한 명당 1분씩만 봐도 191분, 꼬박 3시간11분이 걸린다.   '성실한 유권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거리며 후보 정보를 뒤졌다. 고맙게도 인터넷에는 '밸럿피디아(Ballotpedia.org)'라는 선거 전문 백과사전이 있다. 출마 후보의 이력은 물론이고 출마의 변도 일문일답식으로 자세히 올려져있다.   올해 예비선거 투표용지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후보는 연방상원직에 도전한 티모시 어시치 주니어다. 민주당 소속이고 의사다. 어시치 후보의 이름은 금시초문이다. 직업 정치인이 아닌 첫 출마한 아웃사이더니 당연하다. 반면 그가 맞서는 현역인 알렉스 파디야 의원은 익숙하다. LA지 7지구 시의원에 주상원의원, 주총무처장관까지 지냈으니 그의 이름 옆 공란을 칠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유혹을 꾹 참고 그의 출마 정보를 읽었다. 마지막 질문과 답은 이렇다.   -의회에서 타협은 어떻게 해야하나?   "주고 받는 건 의회의 본질이다. 하지만 본래 법안에 다른 법안을 끼워넣어 추가하는 건 타협이 아니다. 반대로 일부를 빼서라도 통과시켜야만 국민들에게 빨리 혜택을 줄 수 있다."   어시치 후보의 그럴 듯한 철학을 읽고는 나머지 190명 후보의 변을 보는 걸 포기했다. 아마추어 정치인이 이 정도라면 후보들의 말로 적임 여부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드는 생각은 하나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열심히 일할 후보들의 명단은 없을까.'   투표 용지는 사실 유권자들에게는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나 마찬가지다. 유권자의 신성한 권리를 충실히 수행하고 싶지만 투표다운 투표를 하긴 어렵다. 뭘 하는 자리인지 모르고 200명에 가까운 후보들은 더더욱 잘 모른다. 답 없는 고민만 하다가 결국 지지 정당이나 낯익은 후보 이름을 찾아 '찍기'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한번 해본 사람이 잘하겠지'라거나 '같은 한인이니까 무조건 뽑아야 하지 않겠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말이다. 소신이나 공약 대신 자기합리화가 투표에 담긴다.   투표가 어렵다는 한인들을 위해 중앙일보는 난수표를 해독할 수 있는 '커닝페이퍼'를 하나씩 내놓고 있다. 후보들을 소개하고 공개지지한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나를 위해 일할 적임자가 누군지 검증했다.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난감함에 고민하는 것은 중앙일보의 몫이다.   투표는 쉬워야 한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스토리 In 투표용지 난수표 우편투표 용지 출마 후보 후보 정보

2022-05-15

[스토리 In] 사표가 아닌 무효표

 무효표는 많았다.   이번 대선에서 30만 7542표가 소용없는 표였다. 윤석열 당선인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간 득표수 차이인 24만7077표 보다 6만465표나 더 많다.   역대 대선과 비교해도 많다. 무효표는 15대 40만 195표, 16대 22만 3047표, 17대 11만 9984표, 18대 12만 6838표, 19대 13만 5733표였다. 직전 대선인 19대와 비교하면 이번 20대 대선에서 2배가 넘는 무효표가 나왔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15대 대선에서 발생한 무효표 40만 195표 이후 25년 만에 가장 많다고 한다.   분석가들은 무효표가 많은 가장 큰 이유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와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선 후보가 각각 윤 당선인, 이 후보와 단일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퇴한 후보들의 이름이 9일 본투표의 투표지에 여전히 올라 있어서다.   재외선거에서도 무효표는 많았다. 이번 재외선거는 해외 115개국(177개 공관), 219개 투표소에서 실시됐다. 재외선거에 참여한 16만1000명중 1만3000여표가 무효표였다.   재외선거 무효표는 사실 무효가 될 표가 아니었다. 2월23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됐는데 당시는 안 후보나 김 후보가 사퇴하기 전이어서 두 사람을 찍은 표들이 모두 무효표로 처리됐다. 2009년 이후 도입된 재외선거 대선에서 후보 사퇴로 인한 무효표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신껏 찍은 내 표가 무효표가 됐다는 데 한인들의 허탈감은 컸다. 미국 중부에 사는 한 유권자는 "투표장에 가기 위해 16시간을 운전했는데 단일화 때문에 내 표가 무효표가 됐다"며 "안철수 찍으면 사표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먼길 마다하지 않고 가서 투표했는데 내가 지지한 후보가 내 표를 사표로 만든 셈"이라고 했다.   분통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재외국민 투표 종료 이후 후보 사퇴를 제한하는 '안철수법' 제정해 주세요"라는 글로 표현됐다. 글의 작성자는 내 표를 무효표로 만든 후보와 제도를 꾸짖는다. "투표를 다 끝낸 이후의 후보 사퇴로 인한 강제 무효표 처리는 그 표를 던진 국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선례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다음 선거에도 재외국민 선거 진행 이후 급작스럽게 사퇴하는 경우가 생길 텐데 그렇게 되면 재외국민 투표자들이 안심하고 투표할 수 있겠는가"   재외선거에선 유효표가 무효 처리됐지만 본투표에서는 고의적인 사표들도 있었다. 일부러 무효표를 던진 한 유권자의 소감은 이렇다. "1번과 2번 사이 빈 공간에 도장을 찍었어요. 도저히 누굴 찍을 수가 없어서…"   "투표 용지에 아예 도장을 찍지 않았어요. 지난 5년간 민주당에 실망을 많이 해 정권이 바뀌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국민의힘도 쇄신했다는 느낌은 못 주는 것 같아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개표참관인이 놀란 장면들도 있다. 대전에서 개표사무원으로 개표 작업을 진행한 강모씨는 "한 후보의 이름을 긋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써 놓은 표도 있었다. 유권자가 '뽑을 사람이 없다'는 거부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 0.73% 차이로 이기고 졌다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 유권자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특정 후보를 찍은 유효표보다 무효표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번과 2번 사이에 찍은 도장, 아무도 찍지 못한 도장, 노 전 대통령의 이름 위에 찍힌 도장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유권자로서 권리와 의무인 투표는 하겠지만 차마 당신들은 뽑을 수 없다'는.   여야 모두 박빙 승부의 승패 원인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지역별, 세대별, 성별 표심을 읽으려고 고심한다. 해답은 일부러 던진 '사표'에서 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효표는 많았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스토리 In 무효표 사표 재외선거 무효표 재외국민 투표자들 강제 무효표

2022-03-13

[스토리 In] '풋볼 지수'의 추억

풋볼 지수가 그립다.   매년 수퍼보울이 열리는 이맘때면 네 글자는 머릿속에서 풋볼 공처럼 튄다. 13년 전 기사 때문이다. 미주중앙일보가 2009년 1월29일자에 게재한 특집 기사의 제목이 ‘풋볼 지수’였다.   한인들의 미국화 정도를 수치로 가늠한, 이전에 없던 실험적인 기사였다. 1면에 커버 기사로 알리고 안쪽 2개면을 관련 기사 6꼭지로 다 할애했으니 편집도 파격적이었다.   기자 3명이 매달린 취재는 ‘가장 미국적인 문화 중 하나가 풋볼’이라는 대전제로 시작한다. 그 뒤로는 연역적으로 풀었다. ‘미국인이라면 풋볼을 잘 안다’→ ‘한인도 미국에 산다’→ ‘그렇다면 한인도 풋볼을 잘 알까?’로 화두를 던졌다.   ‘풋볼을 얼마나 아는지’가 ‘미국화의 척도’라는 등식을 얻었으니 조사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풋볼 기초상식 10개 문항을 다양한 연령대의 한인 266명에게 물었다. ‘한 팀당 몇명이 뛰나’가 예문 중 하나다.   그 결과 한인들의 풋볼 지수는 10점 만점에 평균 2.6점에 그쳤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평균 지수가 8~9점인데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였다. 미국의 한인 이민사회가 여전히 ‘고립된 섬’이라는 증거였다.   ‘아마 그럴 것이다’는 현상을 수치로 입증했으니 뒤따른 관련 기사들은 힘있게 달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다. “아침에 일어나 밥과 국을 먹고, 한인 언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저녁에 한국 TV프로그램을 시청하는 ‘평균 한인’들에겐 풋볼(미국) 문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기사는 이해하기 쉬웠다.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지수(index)들의 학습효과 덕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빅맥 지수다. 맥도널드의 빅맥 가격을 달러로 환산해 각 나라의 구매력을 평가 비교하는 경제 지표로 쓰인다. 한국에는 ‘김치 지수’가 있다. 4인 가족용 김치 담그는 비용을 수치화한 소비자 체감형 물가지표다.   풋볼 지수 기사의 반응은 갈렸다. 참신하다, 재미있다는 격려가 많았다. 반대 의견도 있었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고작 10문항으로 가늠할 수 있느냐, 266명이라는 작은 표본이 한인 사회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특집을 준비한 3명의 기자들은 만족했다. 좋다, 나쁘다는 뻔한 이분법적 평가는 이들에게 진부했다. 이들이 바랐던 건 ‘이게 뭐지?’라는 궁금증의 확산이었다. 그 자신감은 독창성에서 왔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부정적인 평가마저도 새로웠다.   13년 전의 풋볼 지수를 꺼낸 건 수퍼보울 때문이 아니다. 더이상 새로움을 찾기 어려운 언론의 현실이 떠올라서다. 신문(新聞)은 구문(舊聞)이 된 지 오래고, 라디오는 운전할 때나 들을까 말까며, TV로는 9시에 뉴스 대신 차라리 넷플릭스를 본다.   사건은 동네 주민이 스마트폰으로 먼저 생중계하고 정치판 해설도 유튜버들이 더 깊게 전한다. 기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얼마 전 식당 뒷자리에서 들려온 대화에 뜨끔했다. “다른 신문인데 기사는 다 똑같아, 볼 게 없어.”   신문사 밥을 먹는 사람으로 억울한 생각도 든다. 편집국 입장에선 인력은 없고, 지면은 많다. 경영진 입장에선 지면광고 시장은 계속 좁아지는데 인건비는 갈수록 오른다.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아직 명확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미 답은 나와있는지도 모른다. 종이 지면을 통해 읽을 수밖에 없는 기사, 라디오로 들어야만 더 잘 들리는 보도, TV로 봐야만 하는 뉴스 말이다.   몇분 먼저 보도했다는 이유로 ‘단독’이라는 머리글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다른 언론에서 따라갈 수 없는 보도가 ‘단독’이어야 한다.   13년 전 풋볼 지수를 쓴 기자 3명은 신문사를 떠났다. 그들이 던진 공을 누군가는 받아 터치다운을 하기 바란다.   풋볼 지수가 그립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스토리 In 풋볼 지수 풋볼 지수 풋볼 기초상식 관련 기사들

2022-02-13

[스토리 In] 말리후안과 마리화나

마리화나는 마약이 아니다.   대중적 인식은 그렇게 굳어졌다. 캘리포니아에서 '기호용' 판매와 재배를 전면 허용한 지 올해로 벌써 5년째니 그럴만도 하다.     마리화나가 마약의 꼬리표를 뗀 흔적은 일상에 널려있다. 특유의 구린 냄새는 길거리, 아파트, 건물, 주차장 어디서나 코를 찌른다.     주택 발코니에서는 '마리화나 화분'도 종종 목격된다. 사고 팔고 피우는 것뿐만 아니라 21세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집에서 6그루까지 합법적으로 기를 수도 있다.     담배보다 더 흔해진 이 현상은 전국적이다. 2021년 현재 18개주와 워싱턴 DC, 괌까지 20개 지역에서 마리화나는 '기호용(recreational)'이라는 합법적 제품명으로 '의료용'으로만 제한됐던 규제를 벗었다.   합법화를 놓고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시행 후 큰 부작용은 없는 듯했다. '마리화나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거나 '마리화나에 취해 총기를 난사했다'는 식의 언론 보도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부작용의 냄새는 흔한 일상이어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다.     얼마 전 플로리다의 인기 한인 유튜버가 본인이 마리화나에 빠져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동영상을 통해 고백했다. 유튜브상에서 '코리안 재호(Korean Jaeho)'라는 채널을 운영하는 지재호(20)씨다.   그는 고교 졸업반 시절인 3년 전 미국 고교생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영상에 담아 올리면서 17만명에 달하는 구독자를 거느린 '스타 유튜버'로 떠올랐다. 그의 성공담을 미주중앙일보 뉴스레터로 소개했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한인이었던 그는 차별에 시달릴 법도 했지만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여러 친구와 잘 어울렸다. 학점도 3.8이 넘는 우등생이었기에 유튜버로서 그의 성공은 다른 한인 청소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9월부터 돌연 유튜브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두 달여 만에 올린 동영상에서 '어떻게 거의 죽다 살아났는지(How I almost died)' 털어놨다.   그가 마리화나에 빠지게 된 건 팬데믹이 터지면서다. 펄펄 끓는 청춘이 나가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니 마리화나라도 피워야 했단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 언제든 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마리화나는 '입문용 마약(gateway drug)'이 됐다. LSD, Acid 등 다른 마약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달에 한 번, 그러다 일주일에 한번, 어느새 매일 빠지게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혼자 방에서 마약을 먹고 망상에 갇혀 자해 행위를 하다가 집 밖으로 뛰쳐나갔고 소란을 피운 끝에 경찰에 체포됐다. 재소자병동에 72시간 수감됐던 그는 그 후 한 달간 중독재활센터에 갇혀 지내야 했다.   지금은 회복됐지만 그 안에서 꼬박 보름 동안 금단증상 때문에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냥 죽은 줄 알았다. 내가 죽어서 이 세상에 갇힌 줄 알았다"고 했다.   그의 경험은 지금 한인 10대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흔해 빠진 일상이다. 현상이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뿌리가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마리화나에 대해 잘 모른다. 호칭조차 낯설다. '조인트(joints)'가 말아 피우는 대마초고 '블런트(blunt)'는 시가처럼 생긴 마리화나며 '봉(bong)'은 물담배 방식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다. 전자담배로 피우는 액상 마리화나는 냄새도 나지 않는다.   마리화나(marijuana)의 어원에는 여러 가설이 있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 나우아족의 언어 나와틀어인 '말리후안(Mallihuan)'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말리후안은 '포로(prisoner)'라는 뜻이다.   이 가설은 마치 팬데믹 상황을 예견한 듯 들린다. 감옥처럼 갇힌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구로 선택한 마리화나가 실제 감옥으로 향하는 출입문(gateway)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그 출입문 앞에서 얼마나 많은 한인 청소년들이 서있을지.   마리화나는 마약이 아니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스토리 In 말리후안과 마리화나 마리화나가 마약 마리화나 화분도 액상 마리화나

2022-01-17

[스토리 In] 백신의 확증편향

백신이 문제다.   어디를 가나 백신 찬반론 얘기다. 접점 없는 충돌은 종종 토론을 넘어 감정다툼이 되고 만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느 편을 들기가 어렵다. 양쪽 모두 논리적 허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자기 주장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백신을 맞아야만 한다는 쪽에서는 효용성을 앞세워 부작용에 대해선 눈감는다. 극소수일 뿐이니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쪽에서는 백신의 효용성을 믿지 않고 부작용을 확대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팬데믹이라는 대전제 자체를 부정한다.   팬데믹 이후 심해진 사회현상중 하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심리다. 좀 어려운 말로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다 확증편향은 있다. 특히 내가 원하는 결과를 간절히 바랄 때, 그동안 옳다고 믿어온 신념을 지켜야만 할 때 더 도드라진다.     확증편향에 빠지기는 쉽다. 나열된 사실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경제학에선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 하는데 맛있는 체리만 골라 먹는 걸 뜻한단다.     신문, 방송 매체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기자들의 ‘체리 피킹’ 행위 때문이다. 먹음직한 팩트만 강조하고, 식욕을 떨어트릴 수 있는 팩트는 쏙 빼면 없던 일도 사실로 만들 수 있다.     2005년 당시 폭스뉴스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오라일리 팩터(O’Reilly Factor)'의 체리 피킹은 전설처럼 남아있다.   부시 정부의 빈곤퇴치정책을 치켜세우기 위해 직전 클린턴 행정부의 집권 4년차 빈곤율과 부시 집권 4년차를 비교했다. 각각 13.7%와 12.7%였으니 시청자들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전체 그림의 사실은 달랐다. 클린턴 재임기간에 빈곤율은 계속 낮아졌고 퇴임한 2000년에는 3.4%까지 떨어졌다. 쉽게 말해 빈곤율 3.4%로 출발한 부시 행정부가 불과 4년 만에 다시 12.7%까지 올려놓았던 셈이다. 비판을 해도 부족할 통계를 체리 피킹으로 교묘하게 눈속임한 보도였다.   전문가들은 인간이 확증편향을 갖게 되는 이유를 크게 2가지로 본다.     먼저 '자기 보호를 위한 본능'이라는 시각이다. 내가 지켜야만 하는 신념과 충돌하는 정보는 축소나 왜곡으로 '재해석'해 위험요소를 차단하는 생존 전략이라는 의견이다. 신념의 붕괴를 막으려는 본능적 행위라는 설명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적 우월감이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확증편향 현상은 최근 SNS라는 '체리 피킹' 도구를 만나 더 극명해졌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보여준다. 또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친구로 이어준다. '다른 사실'을 알 기회조차 없어졌지만 오히려 그게 더 마음 편하다고들 한다.   접점없는 백신 논쟁에도 SNS가 한몫했다. 상대를 반박할 전문자료들은 이미 '내 친구들'이 친절하게 체리피킹해 SNS로 알려줬으니 절대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양쪽 모두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어떤 백신도 100% 안전하거나 100% 효과가 확실할 수 없다는 '팩트'다. 그러니 백신을 믿을 수 있다느니 반대로 효과가 없다느니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백신의 접종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온전히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절대적 진실이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한쪽을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사람은 '최선'을 고른다. 물론, 최선의 우선순위는 개개인이 다를 수 있다.   2010년과 2013년 2차례 아프리카의 극빈국인 '차드'에 취재차 다녀왔다. 듣도보도 못한 나라에 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백신 접종이었다. 장티푸스, 황열병, 광견병 등 3가지 백신을 한꺼번에 맞는 바람에 며칠간 심하게 앓아야 했다. 또 말라리아 약인 '클로로퀸'은 다녀와서까지 한동안 먹어야 했고, 그 부작용으로 두통에 시달렸다.   아프고 힘든 백신과 약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안전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해보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때 아들은 돌을 갓 넘긴 아기였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아들에게 몹쓸 병을 옮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당시 내겐 '최선'이었다.   백신은 문제가 아니었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스토리 In 확증편향 백신 백신 논쟁 확증편향 현상 가나 백신

2021-12-12

[스토리 In] 억울한 의사, 더 억울한 환자

 의사들은 억울하다.   노력과 결과가 항상 같지만은 않아서다. 정성껏 치료해도 예후가 나빠지면 돌팔이 소리를 듣기 일쑤다.     일상의 포기도 강요 받는다. 긴급전화는 시도 때도 없다. ‘긴급하지 않은’ 전화라도 받지 않으면 무책임한 의사로 낙인 찍힌다.   팬데믹이 터지고 의사들의 자괴감은 더 깊어졌다. 갇힌 일상의 억눌린 감정들은 종종 의사들에게 향한다.     얼마 전 만난 한 내과 의사는 환자에게서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았던 경험을 털어놨다. “한 환자가 코로나19 증세를 보이는 것 같아 검사했다. 걱정대로 양성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검사결과를 받은 환자가 ‘분명히 당신 병원에서 감염됐다’면서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하더라.”   이러니 의사 노릇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푸념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사들이 얼토당토않다고 말하는 환자들의 주장 중 일부는 억울하다는 항변만으로 덮어지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지난 2월 LA한인타운 내 산부인과 박모 전문의를 상대로 가주검찰이 제기한 환자 성추행 혐의도 그중 하나다. 명문대 출신의 그는 1989년 의사면허를 받은 32년차 베테랑 전문의다.     가주의사면허위원회(MBC)가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가주 검찰의 고소장에는 박 전문의로부터 진료 중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한인 여성 3명의 주장이 담겨있다. 피해 일시는 2017년, 2018년, 2019년으로 서로 다르지만 모두 30대 여성이다.     환자들의 주장에는 닮은 점이 있다. 가주검찰은 “박 전문의는 환자들에게 설명 없이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가슴을 만졌다”고 고소장에 적었다. 예를 들어 ‘피해환자 1’ 여성의 방문 목적은 유방암이 아니라 자궁경부암(pap smear) 검사였다.     ‘피해환자 2’ 여성 역시 아랫배 통증으로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윗옷 아래로 박 전문의가 손을 넣어 가슴을 만졌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부적절한 발언’이다. 예를 들어 피해환자 2는 “박 전문의는 내게 ‘성병(STD) 감염이 의심된다’면서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후 이 환자가 다른 의사에게 재검진을 받은 결과 성병 바이러스는 검출되지 않았다.   가주검찰은 고소장에서 박 전문의의 혐의를 5가지로 나열했다. 환자 1과 환자 2를 상대로 한 성착취(sexual exploitation),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위(sexual misconduct), 환자 3명 모두를 상대로 한 업무상 중과실, 반복된 과실행위, 진료기록 부실 등이다.   박 전문의로서는 유방암 검사의 일환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더욱이 남성인 그가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여성 환자를 상대해야 하는 업무적 특성상 성추행이라는 의혹을 받는 것조차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번 혐의는 더 철저하게 가려져야 한다.     통상적으로 징계 심사 과정은 의사들에게 유리하다. MBC는 15인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과반인 8명이 의사다. 설사 의사의 과실이 입증된다고 해도 면허 박탈의 중징계보다는 낮은 처벌이 내려지는 경우가 더 많다.     비영리단체 캘리포니아헬스라인이 지난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의 성추행 징계 135건을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49건이 보호관찰(probation)로 결론났다.   시간도 의사들 편이다. 피해 고발 접수부터 혐의에 대한 유무죄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평균 3년이 걸린다.     그마저도 의사들은 변호사를 선임해 민사소송으로 항소할 수 있다. 최종 유죄로 입증되기 전까지 의사들은 무죄다.   무죄라면 억울한 항변을 3년 동안이나 되풀이해야하는 의사들도 딱한 처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만약 유죄라면 그 3년간 결과를 기다려야만 하는 환자들의 심정 역시 짐작하기 어렵다. 심사관도, 시간도, 돈도 내편이 아닌데 말이다.   환자들은 더 억울하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스토리 In 의사 환자 피해환자 2 여성 환자 환자 혐의

2021-11-14

[스토리 In] 침묵의 대재앙 II

 검색만해도 찾을 수 있었다. 잊혀진 이름들은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2018년 연중기획물로 한인 실종자 찾기 프로젝트를 연재했다. 당시 전국 실종자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졌다. 연방법무부 산하 사법연구원(NIJ)이 만든 전국 실종자 통합 데이터베이스 ‘네임어스(NamUs)’를 비롯해 3개 데이터베이스를 찾아 검색했다. 등록된 한인 실종자는 14개주에 걸쳐 34명으로 집계됐다. 어쩌면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는 그들의 사연을 기사화했다. ‘침묵의 대재앙’이라는 제목의 칼럼도 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가족들에게 안식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3년 전 한인 실종사건 프로젝트를 떠올린 이유는 요즘 거의 모든 주류언론들이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는 백인 여성 실종 사망사건 때문이다. 약혼자와 함께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됐다가 지난달 19일 숨진 채 발견된 개비 퍼티토(22) 사건이다.     한달 넘도록 대서특필되고 있으니 ‘실종 백인 여성 증후군’이라는 지적이 나올만도 했다. 언론이 ‘푸른 눈에 금발 여성’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비판이다. 이 덕분에 지난 6월28일 캘리포니아 유카밸리에서 실종된 한인 여성 로렌 조(30)씨 사건이 주목을 받게됐다.   언론의 압박을 받은 수사당국은 수색 작업을 재개했고 지난 11일 실종 지역 인근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를 찾아냈다. 아직 그녀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가족들은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붙잡을 수 있게됐다.   2건의 실종사건을 지켜보면서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안타까움이 더 컸다. 주목받지 못한 수많은 사라짐 때문이다.   3년전 취재 당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한인은 최연소 실종자인 형제다. 당시 4살 이지호군과 6살 형 지수군은 2009년 7월11일 오리건에서 실종됐다. 벌써 12년이 지났으니 만약 살아있다면 형제는 16살, 18살이 된다.   이들 형제만큼이나 딱한 사연은 46년된 최장기 실종자다. 1975년 6월8일 델라웨어주 휴양도시 레호보스 비치(Rehoboth Beach)에 살던 송 임 조셉(Song Im Joseph)씨다. 당시 21세였던 조셉씨는 실종 7개월 전 한국에서 주한미군인 남편 앨톤 조셉(당시 24세)과 결혼해 낯선 땅에 왔다. 친척, 친구 한명 없는 그녀는 이날 집에서 ‘증발’했다. 당시 경찰 조서에 따르면 부엌 스토브 위에는 그녀가 조리 중이던 음식이 있었고, 지갑과 여권, 신분증도 집에 그대로 있었다.   임씨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델라웨어주경찰국 미제사건 책임자인 마크 라이드 수사관과 인터뷰해 기사화했다. 그는 그녀의 수사파일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라이드 수사관은 그녀의 남편 앨톤을 용의자로 보고 여러차례 보강수사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칼럼을 쓰기 위해 3년 만에 다시 같은 작업을 했다. 네임어스 등 3개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그새 한인 실종자는 10명이 늘었다. 현재 20개주에서 44명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40여년 동안이나 조셉씨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라이드 수사관은 ‘침묵’ 때문이라고 했다. “분명히 누군가는 그녀의 실종에 대해 알고 있다. 보복이 두려워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관심이 없어서다.”   요즘은 조셉 씨가 사라진 1970년대에 비해 실종자를 찾기가 훨씬 쉽다. 과학기법과 첨단 기기들도 도움이 되지만 인터넷이라는 실시간 공유 게시판 덕분이다. 정구현 / LA 선임기자·부장

2021-10-18

[스토리 In] 침묵의 대재앙 II

검색만해도 찾을 수 있었다. 잊혀진 이름들은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2018년 연중기획물로 한인 실종자 찾기 프로젝트를 연재했다. 당시 전국 실종자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졌다. 연방법무부 산하 사법연구원(NIJ)이 만든 전국 실종자 통합 데이터베이스 ‘네임어스(NamUs)’를 비롯해 3개 데이터베이스를 찾아 검색했다. 등록된 한인 실종자는 14개주에 걸쳐 34명으로 집계됐다. 어쩌면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는 그들의 사연을 기사화했다. ‘침묵의 대재앙’이라는 제목의 칼럼도 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가족들에게 안식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3년 전 한인 실종사건 프로젝트를 떠올린 이유는 요즘 거의 모든 주류언론들이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는 백인 여성 실종 사망사건 때문이다. 약혼자와 함께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됐다가 지난달 19일 숨진 채 발견된 개비 퍼티토(22) 사건이다.     한달 넘도록 대서특필되고 있으니 ‘실종 백인 여성 증후군’이라는 지적이 나올만도 했다. 언론이 ‘푸른 눈에 금발 여성’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비판이다. 이 덕분에 지난 6월28일 캘리포니아 유카밸리에서 실종된 한인 여성 로렌 조(30)씨 사건이 주목을 받게됐다.   언론의 압박을 받은 수사당국은 수색 작업을 재개했고 지난 11일 실종 지역 인근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를 찾아냈다. 아직 그녀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가족들은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붙잡을 수 있게됐다.   2건의 실종사건을 지켜보면서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안타까움이 더 컸다. 주목받지 못한 수많은 사라짐 때문이다.   3년전 취재 당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한인은 최연소 실종자인 형제다. 당시 4살 이지호군과 6살 형 지수군은 2009년 7월11일 오리건에서 실종됐다. 벌써 12년이 지났으니 만약 살아있다면 형제는 16살, 18살이 된다.   이들 형제만큼이나 딱한 사연은 46년된 최장기 실종자다. 1975년 6월8일 델라웨어주 휴양도시 레호보스 비치(Rehoboth Beach)에 살던 송 임 조셉(Song Im Joseph)씨다. 당시 21세였던 조셉씨는 실종 7개월 전 한국에서 주한미군인 남편 앨톤 조셉(당시 24세)과 결혼해 낯선 땅에 왔다. 친척, 친구 한명 없는 그녀는 이날 집에서 ‘증발’했다. 당시 경찰 조서에 따르면 부엌 스토브 위에는 그녀가 조리 중이던 음식이 있었고, 지갑과 여권, 신분증도 집에 그대로 있었다.   임씨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델라웨어주경찰국 미제사건 책임자인 마크 라이드 수사관과 인터뷰해 기사화했다. 그는 그녀의 수사파일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라이드 수사관은 그녀의 남편 앨톤을 용의자로 보고 여러차례 보강수사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칼럼을 쓰기 위해 3년 만에 다시 같은 작업을 했다. 네임어스 등 3개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그새 한인 실종자는 10명이 늘었다. 현재 20개주에서 44명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사라지고, 퇴근길에 증발하고, 친구와 여행간뒤 소식이 끊어지고, 마켓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집에 돌아오지 않은 한인들이다.   40여년 동안이나 조셉씨를 찾지 못하는 이유를 라이드 수사관은 ‘침묵’ 때문이라고 했다. “분명히 누군가는 그녀의 실종에 대해 알고 있다. 보복이 두려워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관심이 없어서다.”   요즘은 조셉 씨가 사라진 1970년대에 비해 실종자를 찾기가 훨씬 쉽다. 과학기법과 첨단 기기들도 도움이 되지만 인터넷이라는 실시간 공유 게시판 덕분이다.   SNS는 잊혀진 사람들을 찾는데 최고의 도구이지만 정작 그들의 사진보다는 무생물들로만 가득하다. 어제 구입한 명품, 방금 뽑은 고급차, 별 다섯 개 레스토랑의 음식, 럭셔리 호텔방, 비싼 휴양지의 절경, 마스크를 쓰네마네, 백신을 맞네안맞네 등 다들 ‘나’를 알리기에 바쁘다.     팔로워수가 많은 분들께 부탁하고 싶다. 실종자들의 사진을 한번이라도 공유해주길 바란다.     실종자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검색만해도 찾을 수 있다. 정구현 / 선임기자·부장

2021-10-13

[스토리 In] 부도칸이 부러운 이유

커뮤니티는 알고 있었다. 타운은 말라갔다. 이민자는 줄어들고 젊은이들은 커뮤니티에 관심을 잃었다. 모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해진 3ㆍ4세들은 타운에 등을 돌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후죽순 난개발이 시작됐다. 토박이 주민들이 쫓겨나고 동네 상점들도 밀려났다. 정체성을 잃은 타운을 여행객들은 외면했다. 2000년대 말 LA 리틀도쿄는 멸종 위기를 직시했다. 절박함으로 커뮤니티 재건에 매달린지 10여 년이 지난 올해 6월 리틀도쿄에서 부러운 소식이 들렸다. '부도칸(Budokan.무도관)'이 문을 열었다. 체육관 겸 커뮤니티 센터인 부도칸은 로스앤젤레스 스트리트 선상 2가와 3가 사이 3만9000스퀘어피트 부지에 2층으로 지어졌다. 3500만달러라는 큰 돈을 모아 2017년 8월 착공해 3년만인 지난해 6월 완공했다. 팬데믹으로 완공식을 1년 연기하고도 끝내 열지 못했지만 부도칸의 개관은 리틀도쿄에 역사적인 사건이다. 부도칸은 리틀도쿄가 1970년대 중반부터 추진해온 반세기 숙원사업이다. 일본을 상징하는 도쿄의 대형 경기장이자 공연장인 '닛폰부도칸'을 LA에 옮겨 짓자는 의도였다. 계획은 좋았지만 예산은 부족했고 부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커뮤니티의 공감대를 얻지 못해 중단됐다. 그러던 2011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LA시정부 소유 주차장이었던 현재 부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으면서 프로젝트는 되살아났다. 여기까지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현재 LA한인타운에 추진되고 있는 한미박물관과 무척이나 닮았다. 한미박물관도 30년 된 숙원사업이다. 부지도 부도칸처럼 시정부 소유 주차장(6가와 버몬트 애비뉴)을 거의 무상 임대받았다. 3200만 달러인 건축 예산도 부도칸과 비슷하다. 여러모로 닮은 두 숙원사업을 놓고 리틀도쿄는 꿈을 현실화했지만 우린 아직 착공조차 못했다. 차이점을 꼬집으려 한다. 먼저 부도칸은 커뮤니티의 미래 존속에 초점을 둔 큰 그림의 산물이다. 멸종 위기에 처했던 리틀도쿄는 2011년 탈출구를 찾기 위해 범커뮤니티 협의체를 구성했다. 그리고 3년간 커뮤니티 전체 의견을 수렴해 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내놨다. 100년 앞을 내다본 커뮤니티 부활 프로젝트인 '지속가능한 리틀도쿄(Sustainable Little TokyoㆍSLT)'가 그 이름이다. SLT의 핵심 사업이 부도칸 건립 프로젝트였다. 무엇보다 부도칸은 '함께' 지었다. 복지 비영리단체 리틀도쿄서비스센터(LTSC)가 주도한 SLT협의체에는 일미상공회의소 일미문화커뮤니티센터(JACCC) 일미박물관 등 30여 개 일본계 대표단체를 비롯해 사찰과 교회 등 종교기관 식당 동네빵집 커피점 마켓까지 참여했다. "자식들이 맘껏 뛸 수 있는 공간 하나 남겨주지 못해 되겠는가"는 호소는 공감대를 얻었다. 부도칸 건립에 남은 숙제였던 3500만달러 예산 마련에 모두가 뛰었다. 재력가들도 앞다퉈 기부했다. 부도칸의 정식 명칭은 '테라사키 부도칸'이다. 장기 조직 유형 검사법을 발명한 고 폴 테라사키 전 UCLA 교수 가족이 350만달러 거액을 기부해 그 이름을 붙였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힘을 보탰다. 초등학생들이 볼링 토너먼트를 열어 9000달러를 모아 전달했다. 노인아파트에 50년 넘게 살다가 본국으로 귀국한 할머니는 한 푼 두 푼 모았던 장롱속 1000달러를 내놓기도 했다. 주LA일본총영사관도 관저 만찬 행사를 열어 적극 지원했다. 부도칸은 우리에게 빠진 그 중요한 조각들을 홈페이지 머리글에 얄밉도록 분명하게 적었다. '테라사키 부도칸' 이름 뒤에 굳이 넣은 짧은 문장 하나는 이렇다. 'a community-driven project'. 커뮤니티가 주도한 프로젝트라는 뜻이다. 'Korean American Museum'의 홈페이지 머리글 뒤에는 어떤 문장이 적힐지 궁금하다. 분명한 건 지금까지 박물관의 행보만 본다면 머리글에 '커뮤니티 주도'를 넣을 수 없다. 소수의 이사들만 모여 설계안을 6차례나 주물렀다. 그동안 한차례도 공청회를 열지 않았고 운영 내역도 공개하지 않았다. 수차례 지적에도 문은 꽁꽁 닫혀있다. 커뮤니티는 박물관을 모른다.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email protected]

2021-09-14

[스토리 In] 짬짜미와 생존전략

값은 싸지 않았다. LA한인타운 내 한 이사업체는 7월1일부터 가격을 올렸다고 했다. 이전에 작업자 3명을 부르면 시간당 120달러였는데 이젠 150달러를 달라고 했다. 30달러만 더 주면 되는 게 아니다. 이사를 1시간 만에 마쳐도 무조건 3시간 요금을 내야 한다. ‘기본요금’이란다. 그러니 소비자 입장에선 실제로 30달러가 아니라 최소 90달러가 오른 셈이다. 다른 2~3개 업체에 문의했다. 더 저렴한 곳을 찾아보자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하나같이 모두 가격이 똑같았다. 왜 가격이 다 같으냐고 한 업주에게 물었더니 조심스럽게 “협회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했다. 전화를 끊으면서 물음표가 솟아났다. 이삿짐 협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거니와 ‘이래도 되나’는 생각이 들어서다. 당장 ‘가격 담합’이라는 단어부터 떠올랐다. 동종 업체들이 이익을 높이면서 소비자는 잃지 않으려 사용하는 수법이다. 속칭 ‘짬짜미’라고도 하는데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남들 모르게 일부 기관, 조직, 기업이 자기들끼리 하는 부정적인 약속’. 문장에서 핵심 단어는 ‘부정적인’이다. 이삿짐 업체의 약속이 부정적인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먼저 그 ‘약속을 한 업체들’이 궁금했다. LA한인타운에서 30년 이상 운영해 왔다는 한 업체에 문의했다. 업주는 친절했다. 이삿짐 협회가 있느냐고 했더니 정식 협회가 있진 않다고 했다. 다만 몇몇 큰 업체들이 서로 연락해서 가격을 함께 올리기로 한 건 맞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타인종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인 업체의 생존전략이라고도 했다. 그가 설명한 가격 인상 이유를 요점만 정리하면 이렇다. ①7월1일부터 최저임금이 15달러로 올랐다 ②개스비도 작년보다 갤런당 1달러 이상 올랐다. 워컴, 자동차 보험료도 올랐다 ④그동안 없던 정부 수수료가 새로 생겼다. 특히 인건비와 관련해 업주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이삿짐 업계에서는 최저임금보다 시급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15달러로 오르면 20달러는 줘야 작업자들을 고용할 수 있단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사람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도 했다. 설명을 종합하면 업체 운영비가 작년보다 25~30% 정도 더 많이 들고 직원 구하기도 어려우니 비용을 인상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함께 가격을 올리기로 한 것은 한 업체만 올리면 서로 제살 뜯어먹기 경쟁이 될 것이 뻔하니 상생하자는 약속이었다고 했다. 쭉 듣고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이사업체만 가격을 올린 게 아니다. 지금 LA한인타운에서는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설렁탕 한 그릇 사먹기가 겁난다. 최근 몇년 사이 갑자기 올라 16달러대다. 가격 인상의 이유는 업종과 상관없이 대동소이하다. ‘인건비, 재료비, 개스비 등등 다 올랐으니 땅 파서 장사하는것도 아니고….’ 소비자들도 다들 뉴스를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업주들이 이해 못하는 게 있다. 소비자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이다. 가격을 올린 것이 아니라 가격의 인상폭이 불편하다. 30여년간 장사해온 타운의 유명 설렁탕 전문점을 예로 들자. 이 식당의 설렁탕 가격은 5년 전 8.99달러에서 현재 15.50달러다. 7달러가 올랐으니 5년만에 72%가 뛴 셈이다. 그나마 설렁탕은 값싼 설렁탕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삿짐 업체는 소비자들에게 더 무리한 걸 요구하고 있다. 비록 담합이 아니라 생존전략이라고 하지만 소비자들은 선택을 잃어버렸다. 비용이 저렴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가격이 모두 같아서다. 어디에 문의해도 똑같은 비용이라면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존재할 수 없다. 인터뷰했던 업주는 “그래도 이 정도면 싼 편입니다”고 했다. 싸다는 말은 상대 비교할 때나 의미가 있다. 값은 싸지 않다.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email protected]

2021-08-08

[스토리 In] 찜질방에서 부딪친 두 개의 권리

권리는 ‘해도 되는 행위’다. 법률상 정의를 쉽게 풀어쓰면 그렇다고들 한다. 사전적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봤다. 내가 A라는 행위를 해도 된다는 것은 남이 간섭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간섭해선 안 되는 것들이 권리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유롭게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자유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평등권),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국가에 요구하는 권리(사회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참정권) 등이 그 종류다. 이 중 ‘평등권’이 최근 한인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렀다. 평등의 시험대는 LA한인타운 찜질방이었다. 논란은 ‘위 스파(Wi Spa)’라는 업소가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남성의 여탕 출입을 허용했다면서 한 여성 고객이 거세게 항의하는 영상을 SNS에 올리면서 시작됐다. 여성은 동영상에서 이렇게 외쳤다. “남성이 여성 전용 구역에 들어와도 괜찮다는 겁니까? 아직 어린 여자 아이들도 있는데 그 앞에서 성기를 다 드러내도 괜찮다는 겁니까? 위 스파는 그걸 허용한다는 겁니까?” 영상은 순식간에 온라인으로 확산했고, 급기야 1주일 뒤 찬반 시위대가 업소 앞에서 충돌해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를 주류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하면서 전국적 이슈가 됐다. 그 후 언론들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LA타임스 역시 지난 6일 이 논란과 관련해 사설을 게재했다. ‘트랜스젠더 고객들도 다른 모든 고객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제목이다. 성소수자들의 스파 출입 권리를 옹호하는 내용이다. 글의 일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누구도 절대적 편안함을 누릴 권리는 없다. 스파 안에서도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완벽한 편안함은 보장되진 않는다. 그러니 (만약 편안하길 원한다면) 신체를 가리도록 한 규정을 둔 스파 업소를 찾아가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누구나 어디에든 환영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편하든 불편하든 말이다.” 누구에게나 평등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보호해야 할 주체가 빠졌다. 이 경우엔 찜질방에 있던 아이들이다.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아이들에겐 위협이 될 수 있다. 세상 어떤 부모가 알몸의 남성이 성기를 드러내고 다니는 곳에 어린 딸을 데리고 가겠는가. 더군다나 트랜스젠더가 맞는지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다. 만에 하나 소아성애자가 트랜스젠더를 가장해 여탕에 출입한다면 상상조차 끔찍하다. 위 스파를 이용한 한 여성 고객이 지난해 남긴 이용 후기는 아찔하다. 이 여성 역시 여탕 안에서 트랜스젠더가 성기를 드러내고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순간 불편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경악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문제의 트랜스젠더가 함께 온 친구에게 자랑삼아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면서다. 스스로 여자라고 주장해 여탕에 들어온 이 트랜스젠더는 본인이 지금까지 100명도 넘는 여자와 성관계를 했고, 성관계 중 긴장을 풀기 위해 코카인이나 LSD 같은 마약을 종종 한다면서 낄낄거렸다고 한다. 이 여성은 “내 상식으로 그는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변태’였다”면서 “업소가 남자임이 분명한 트랜스젠더의 여탕 출입을 막을 수 없다면 여성 고객들은 이 업소를 갈 수가 없다. 여성들을 보호해달라”고 했다. 권리가 충돌할 때 해결 방법 중 하나가 ‘보다 중요한’ 혹은 ‘우월한 이익’을 보장하고 덜 중요한 이익은 유보하는 것이라고 한다. 찜질방 사건에서 ‘보다 중요한’ 이익의 주체는 절대적 약자인 아이들이다. 트랜스젠더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소수이지만 아이들과 비교할 때 약자가 될 수 없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건 법 이전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윤리적 의무다. 의무의 법률적 정의를 쉽게 풀어쓰면 이렇다고 한다. 의무는 ‘해야만 하는 행위’다. 정구현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1-07-11

[스토리 In]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

1년 전 칼럼의 마지막 문장을 느낌표로 대신했다. 느낌표는 역사상 가장 짧은 편지다. 1862년 소설 ‘레미제라블’을 탈고한 빅토르 위고가 독자들의 반응을 궁금해 하자 출판업자가 보낸 초단문의 답장이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을 느낌표로 끝맺은 이유는 미주중앙일보 이메일 뉴스레터인 ‘똑개비뉴스’ 1호 발송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뉴스레터를 읽고 속시원한 느낌표를 얻길 기대했다. 마치 ‘똑똑한 개인 비서(똑개비)’처럼 어렵고 복잡한 정치 현안부터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알찬 정보까지 친절히 설명하자는 것이 뉴스레터의 의도였다. 지난해 7월28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1호를 내보낸 똑개비뉴스가 다음달 8일이면 100호를 맞는다. 또, 다음달 28일엔 첫 돌을 앞두고 있다. 똑개비뉴스의 지난 1년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언프레시덴티드(unprecedented)’가 가장 근접한 표현이다. 말 그대로 ‘전례 없는, 사상 초유의’ 시간이어서다. 아무도 경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 일상에서 질문들을 넘쳐났다. 백신은, 영업제한은, 지원금은…. 어려운 답들을 친절히 쉽게 설명하려 노력했다. 뉴스레터는 유례없는 이념대립의 시대도 통과했다. 지난해 11월 대선의 맥을 짚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현실에선 초대할 수 없는 두 대선 후보의 토론을 가상썰전으로 꾸며 한인 유권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인정하던, 하지 않던 결과는 똑개비뉴스가 예측했던 대로였다. 양념처럼 넣었던 유튜버 소개 코너 ‘꿈튜버’도 뉴스레터 사상 첫 시도였다. 수천만 달러를 버는 유튜브 스타부터 미국 고등학교의 일상을 전하는 고교생까지 다양한 연령, 직업, 지역의 한인·비한인 40명을 뉴스레터에 담았다. 사실 이 코너의 목적은 유튜브 홍보가 아니라 사람을 소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짧지 않은 언론사 재직기간 배운 교훈 중 하나가 ‘사람 이야기는 배신하지 않는다’였다. 코로나19로 갇힌 일상에 사람 냄새를 전달하고 싶었다. 의도는 어느 정도 통한 듯 싶다. 이젠 전국 각지에서 본인을 소개해달라는 한인 유튜버들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두줄뉴스와 톱10뉴스 코너는 “기사 읽을 틈도 없다”는 독자들을 위해 주요 뉴스만 짧게 요약해 전달했다. 뉴스레터는 내용뿐만 아니라 반응도 유례 없었다. 독자들은 수많은 느낌표를 보내왔다. 공간적 제약에 종이신문으로 전달하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소식들을 원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걸 실감했다. ‘어려운 뉴스 쉽게 요약해주셔서 감사하다’, ‘간지러운 등을 긁어줬다’, ‘바른뉴스 고맙다’, ‘이메일을 받고 지우지 않길 아주 잘했다’ 등 격려의 이메일이 수백 통이다. 독자들의 느낌표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한심한 X, 니가 기자냐?’,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한다니 가짜뉴스, 앞으로 조심해라’, ‘두뇌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시나?’, ‘재수 없다’ 등의 이메일은 뉴스레터 제작에 채찍질이 됐다. 칭찬이나 꾸중이나 똑같이 소중했다. 귀담아 들어야만 지난 호보다 다음 호가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1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뉴스레터를 받아보지 못한 독자들이 있다. 심층 분석과 요약, 사람 이야기까지 한통에 담은 이메일 뉴스레터는 최소한 미주지역에선 똑개비뉴스가 유일하다. 무료로 누구나 받아볼 수 있다. 홈페이지(ttalk.koreadaily.com)에 접속해 맨 위의 ‘무료 구독신청’ 링크를 누르고 빈 칸에 본인 이메일 주소만 넣으면 된다. 똑개비뉴스의 첫 생일을 앞두고 또 다른 1년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어서다. 뉴스레터의 최종 목표는 1호 제목으로 정했었다. ‘250만 미주한인들이 똑개비뉴스를 아는 날까지’였다. 돌이 되었으니 이젠 걸음마를 떼고 보폭을 넓혀 걸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좀 더 빨리 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걸음이 바빠지더라도 똑개비뉴스에 변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있다. 애초 뉴스레터를 시작한 이유다. 똑개비뉴스는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먹고 자란다. 빅토르 위고가 출판업자에게 보낸 초단문의 편지와 같다. 1년 전 칼럼의 첫 문장으로 대신한다. ‘?’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email protected]

2021-06-08

[스토리 In] 귀신을 만드는 사람들

귀신이 보인다. 연방의회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 증거라는 사진이 페이스북에 나돌았다. 언뜻 보면 오싹하다. 로이터 통신 기자가 찍은 사진은 지난달 28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의회 연설 장면이다. 대통령 등 뒤에서 대통령의 시선이 향한 앞쪽을 찍었다. 좌석에 앉은 의원들맨 뒤 출입문 바로 앞에 이상한 검은색 물체가 서있다. 마치 검은 망사를 쓰고 검은 치마를 입은 귀신처럼 보인다. 키도 족히 6피트는 넘어 보인다.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자칭 전문가(?)들의 분석까지 뒤따르자 ‘귀신’은 폭풍 공유되기 시작했다. 댓글도 폭주했다. 상당수 글들은 현 정부를 못마땅해 여기는 이들이 썼다. ‘바이든 정부 의회를 악마들이 점령하고 있는 증거’, ‘악마의 딸이 바이든을 지지하려 출현했다’는 괴담까지 나왔다. 이쯤 되니 주류 언론들이 사실 확인에 나섰다. USA투데이, 로이터, AP 등이 귀신의 정체를 취재했다. 알고 보니 귀신이라던 물체는 방송용 카메라였다. 대통령의 정면 샷을 찍는 CSPAN의 카메라였는데 최대한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검은 천을 카메라 위에 씌운 것이다. 로이터 통신은 귀신이 아니라는 증거로 2018년과 지난해 트럼프 의회연설 당시 비슷한 구도에 찍힌 방송카메라 사진을 공개했다. 귀신 소동의 백미는 그 다음부터다. 악마가 없었다는데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또 거대 언론들이 진실을 덮으려 한다’는 음모론이 귀신처럼 떠돌았다. 진짜뉴스보다 차라리 가짜뉴스를 믿겠다는 불신의 근거는 학습 효과다. 언론들이 때로 사실만 짜깁기해도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다. 귀신 소동이 벌어진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 관련 기사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연설엔 일자리·교육·복지에 이르는 약 4조 달러 규모의 초대형 투자 계획이 담겼다. 그래서 ‘미국이 다시 일어선다’는 기사 제목들이 다수였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의도일터다. 그런데 이 연설의 반향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이날 연설을 2690만명이 지켜봤다고 하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의회 연설을 지켜본 4770만명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려했으나 국민의 관심도는 떨어졌다는 뜻이다. 이날 의회 연설은 취임 100일에 맞춰 바로 전날 이뤄졌다. 언론들은 전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비교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그중 한 언론은 취임 100일간 공식 발언 중에서 사실이 아닌 말들을 분석했더니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무려 7배나 많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숱한 명언(?)들을 남겼다. 코로나19 치료 일환으로 살균제를 인체에 주사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해 뭇매를 맞았고, 재선 승리를 도둑맞았다면서 지지자들의 의사당 행진을 부추겼다. 그런데 ‘7배나 많다’는 말에 감춰진 진실이 있다. 바이든도 사실이 아닌 발언을 67차례나 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이든 대통령은 “내가 취임한 1월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모든 성인들을 접종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백신 매입 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발언은 거짓이다. 트럼프 재직 당시 정부는 이미 10억 도스 분량의 백신 접종 계약을 체결했다. 거짓을 말한 사람에게 손가락이 향하면서 또 다른 거짓말은 가려진 셈이다. 사실을 사실로 가린 왜곡 보도에 대한 반발이 가짜뉴스의 생산 동력이다. 의사당의 귀신도 차라리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이들이 만든 가짜다. 귀신이 실제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날 그 자리에 반드시 귀신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보기 싫은 대통령을 귀신과 묶어 욕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귀신을 만드는 데 귀신인 사람들이다. 귀신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정구현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1-05-09

[스토리 In] 총격과 투표, 두 개의 작은 공

총은 전쟁이다. 영어 단어(gun)의 어원이 그렇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군힐드(Gunnhildr)’에서 유래됐다. 군힐드는 전쟁을 뜻하는 두 단어 ‘gunnr’와 ‘hildr’의 합성어다. 원래는 성벽 투석기의 이름이었는데 중세에 ‘gonne’, ‘gunne’로 변형됐고 지금의 ‘gun’으로 짧아졌다. 총은 피를 부른다. 미국은 그 총 때문에 일상이 참사 현장이다. 지난달 16일 애틀랜타에서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해 8명이 숨졌고, 불과 엿새 뒤인 22일 콜로라도주 마켓에서는 10명이 희생됐다. 또 31일 오렌지카운티 한 사무실 건물에서는 4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중엔 9세 소년도 있다. 언론들이 이번이 3번째 총기난사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다. 총격사건 데이터베이스(Gun Violence Archive)에 따르면 올해 4명 이상 사상자가 발생한 총격 사건은 21건이다. 당연히 민주당 의원들은 또 총기 규제를 역설하고 나섰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걸 알기 때문에 일단 내뱉고 보는 말일지도 모른다. 전미총기협회(NRA)라는 공룡 단체와 여야가 반반 나뉜 의회의 정치공학적 구조, 무엇보다 수정헌법 2조가 보장한 권리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깝다. 그나마 민주당 의원들은 말 뿐이라도 할 말은 하니 나은 편이다. 언제, 어디서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총탄에 희생되는데도 공화당은 엉뚱한 곳에 열을 올리고 있다. 투표권 제한법안이다. 공화 의원들 주도로 47개 주의회에서 361개의 선거 제한법안이 발의됐다. 법안 중 4분의 1이 투표시 신분확인을 더 엄격하게 만들었다. 유권자 등록도 까다롭게 했다. 법은 필요하다. 지난 대선에서 문제가 됐던 선거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정성의 10분의 1만이라도 총기 규제에 동참한다면 총기 규제는 현실화 될 수 있다. 사람 목숨보다 선거제한이 우선 순위는 아니지 않은가. 워싱턴포스트가 총과 선거를 주제로 지난 22일 충격적인 기사를 실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은 분석기사다.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당신이 거주하는 주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울까. 총을 사는 것과 투표하는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정답은 대부분의 주에서 총을 사는 것이 더 쉽다. 신문은 총기를 실제 내 손에 넣기까지 시간과 투표 대기시간을 비교했다. 전국 3분의 2에 해당하는 34개주와 워싱턴 DC 지역에서 투표 대기시간이 총기 구입시간보다 길었다. 반대로 투표가 총기 구입보다 쉬운 곳은 일리노이, 미네소타, 워싱턴 등 단 3개 주에 불과했다. 나머지 13개 주에서는 양쪽 대기시간이 비슷했다. 선거와 총기 구입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특정일에 치러지는 선거는 수많은 인력이 여러 과정을 준비해야 하지만 총기 구입은 상품을 파는 행위일 뿐이라서다. 하지만 총과 선거는 근원을 파보면 비교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총을 의미있게 하는 총탄과 선거를 의미있게 만드는 투표는 공교롭게도 둘 다 어원이 ‘작은 공’이다. 총탄(bullet)은 중세 프랑스어 ‘작은 공(boulle)’에서 나왔고 투표(ballot)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무기명 투표시 사용한 ‘작은 공(pallotte)’에서 비롯됐다. 지난 선거에서 우린 작은 공을 사용했다. 선거라는 도구에 투표라는 작은 공을 넣고 방아쇠를 당긴 결과가 현재다. 어쩌면 내 한 표 때문에 총기 규제를 못하고 어쩌면 내 한 표 때문에 9살 짜리 소년이 숨졌는지도 모른다. 만약 총기 규제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본인이 뽑은 정치인의 입장을 찾아보기 바란다. 진영의 논리에 갇혀서, 혹은 맹목적으로 한 사람을 추종하다가 덮어놓고 작은 공을 쏜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 진짜 전쟁은 투표다. 정구현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1-04-04

[스토리 In] 별무늬와 민무늬

‘그래봤자 배에 그려진 작은 별무늬 하나일 뿐이다.’ 유명 동화작가 ‘닥터 수스(Dr. Seuss)’의 ‘더 스니치스(The Sneetches)’라는 동화를 압축한 문구다. 차별을 반대하는 풍자 동화인데 내용은 이렇다. 스니치는 오리를 닮은 노란색 동물이다. 일부의 스니치들만 배에 작은 녹색 별이 있는데 이들은 별무늬가 없는 스니치들을 오랫동안 차별했다. 어느 날 한 장사꾼이 나타나 별을 그려주는 장사를 한다. 3달러면 별무늬 스니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민무늬의 스니치들이 너도 나도 배에 별을 그린다. 그러자 별무늬 스니치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잃을 위험에 처한다. 다시 장사꾼은 이번에 별을 지워주는 장사를 한다. 별을 없애는 비용은 10달러로 좀 비싸다. 하지만 별무늬 스니치들은 별을 지우는데 줄을 선다. 결국 애초에 누가 별이 있었고 없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스니치들은 별무늬, 민무늬 할 것 없이 다 빈털터리가 되고 장사꾼만 부자가 된다. 1961년 출판된 이 책은 ‘겉모습이 달라도 누구나 평등하다’는 교훈을 심어주는 교재로 60년째 사용되고 있다. 본명이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인 닥터 수스는 여러 작품에서 교훈적 메시지를 담아왔다. 동화 ‘호튼’의 ‘생명체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체’라는 문구는 낙태반대 운동가들의 모토로 쓰였다. 또 ‘로렉스’는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닥터 수스는 20년 전 사망했지만 그의 생일인 3월2일이 미국의 ‘책 읽는 날(Read Across America Day)’로 지정될 만큼 영향력은 아직도 크다. 그런 닥터 수스의 책이 최근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첫번째 작품인 1937년의 ‘그리고 멀베리가에서 그것을 봤던 기억을 떠올려 보니(And to Think That I Saw It on Mulberry Street)’를 비롯해 6개 작품에 등장하는 아시안이나 흑인 캐릭터가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에서다. 논란이 거세지자 닥터 수스 엔터프라이스 측은 80년 넘게 사랑받아온 해당 책들의 출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발표는 최근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인종차별 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LA, 뉴욕에서 한인들이 그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기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길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정류장에 서있다가 이유없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한인사회도 당연히 분개했다. 당국에 범인을 찾으라고 압박하고 한인 정치인들이 나서야 한다며 등을 떠밀기도 했다. 차별에 맞서 일어서는 것은 소수계로서 최소한의 방패다. 그런데,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차별의 가해자가 된 적은 없었는지다. 안타깝게도 증거들은 일상에 널려있다. 타민족 비하 용어는 우리가 그들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 수준이다. 같은 아시안인 일본인을 쪽바리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떼놈이라고 욕한다. 히스패닉은 멕작, 흑인은 깜둥이, 백인은 양놈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우릴 ‘칭총(Ching Chong)’이라고 깔보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한인끼리도 차별한다. A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타대학 출신을 업신여기고, A지역 사투리를 쓰면 덮어놓고 신뢰하지 않는다. 차별은 비뚤어진 우월의식에서 나온다. 내가 더 잘났고, 더 가졌다고, 더 반듯하다고 믿는다. 혹시 차별에 맞서는데 힘을 보태고 싶은 한인들이 있다면 부탁하고 싶다. 거창한 캠페인에 동참하기 전에 혹시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근거없는 우월감부터 없애면 어떨까 싶다. 그래봤자 배 위에 그려진 별 하나일 뿐이다.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email protected]

2021-03-07

[스토리In] 음모론보다 위험한 199표

“보수가 몰락하고 있다.” 5일 의사당 앞에서 초선의 여성 의원은 본인의 추락은 보수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전날 2개 상임위원회에서 쫓겨난 그녀는 자신의 축출에 찬성표를 던진 친정 공화당 하원의원 11명을 ‘배신자’라고도 불렀다. 그중에는 지난 11월 선거에서 하원에 첫 입성한 한인 영 김 의원도 포함되어 있다. 보수의 가치를 개탄한 그녀는 조지아주 14지구 연방하원의원인 마조리 테일러 그린(46)이다. 그녀가 상임위 직책을 박탈당한 이유는 과거의 그녀가 한 말과 SNS에 공유한 글들 때문이다. 그녀는 2001년 9·11 테러 당시 국방부 건물 펜타곤에 충돌한 것은 비행기가 아니라 미사일 혹은 다른 발사체라며 9·11 음모론을 부추겼다. 또 2018년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의 한 고교에서 17명이 희생된 총기 난사 사건은 총기규제를 위해 의도된 위장 작전이라는 주장에 동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산불이 유대인들이 쏘아올린 위성에서 발사한 레이저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지난 2019년 그가 페이스북에 공유한 글이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의장을 끌어내리기 위한 조치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이 빠를 것”이라는 글에 ‘좋아요’를 눌러 공유했다. 이런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은 그녀가 극우 음모론 단체 ‘큐어넌(QAnon)’의 신봉자라는데서 기인한다. 큐어넌은 ‘악마 같은 아동성애자들인 민주당 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원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당연히 그녀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녀는 비록 민주당 하원의원 219명 전원의 찬성과 공화당 하원의원 11명의 찬성으로 상임위에서 쫓겨났지만, 표결 전날 비공개 공화당 모임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했는데 상당수 공화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처럼 징계 대상에 오른 또 다른 공화당 의원이 있다. 네브래스카주의 벤 새스 연방상원의원이다. 공화당위원회는 그의 불신임안을 추진 중이다. 13일 투표한다. 의원직을 박탈당하진 않지만 사실상 당이 그를 버렸다는 뜻이다. 불신임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날 불신임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히 해두고 싶다. 주공화당위원회가 분노하는 이유는 내가 원칙을 위반했거나 보수정치를 버려서가 아니다. 그들의 분노는 내가 단 한 사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는 1인 숭배가 아니다. 물론 당은 나같은 트럼프 비판론자들을 숙청할 수 있지만 이같은 행위는 ‘국가의 암(civic cancer for the nation)’이다.” 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또 다른 공화당 의원이 있다. 상원의 공화당 1인자인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다. 그는 상임위에서 쫓겨난 그린 의원을 놓고 “정신나간 거짓말과 음모론”이라며 “공화당의 암(cancer for the party)”라고 했다. 공화당의 두 상원의원이 내 식구들을 향해 ‘암’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한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보수의 가치 때문이다. 보수는 스스로에게 엄격하다. 질서, 규정, 예의, 전통적 기준을 소중히 여긴다. 또 본능적으로 극단주의를 배척하고 원칙을 따르며 본인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진다. 결정해야 할 순간엔 감정보다는 냉정한 이성을 중시한다. 산불의 원인이 인공위성에서 쏜 레이저 때문이라거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 땅의 사탄을 몰아내기 위해 보내진 구원자라거나, 동료의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겠다거나, 3000여 명이 숨진 비극적인 테러가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은 보수의 그 어떤 가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의 보수에 더 위험한 존재는 그런 그린을 옹호하는 세력들이다. 놀랍게도 그린의 수호천사들은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 199명이었다. 그 ‘정신나간 거짓말’을 한 그린을 보호하기 위해 상임위 축출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공화의원들의 숫자다. 그린 의원이 말한 상식 밖의 주장 중 최소한 한가지는 사실로 보인다. 보수는 죽어가고 있다.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email protected]

2021-02-07

[스토리In] 시위 현장서 무너진 ‘글로리아’

'글로리아'다. 로라 브래니건이 1982년 불러 히트시킨 노래다. 80년대를 대표하는 클럽 댄스곡이다. 경쾌한 박자에 저절로 몸을 흔들게 된다. 노래는 누군가 셀폰으로 찍은 동영상 속에서 크게 틀어져 있다. 현장은 하얀색 대형천막 내부다. 흡사 야외파티장 분위기로 떠들썩하다. 영상을 찍던 남자가 한 여성을 비추며 이름을 부른다. “킴벌리~.” 여성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한동안 여성을 찍던 카메라는 천막 안 정경을 비춘다. 정장을 입은 남녀들이 앞쪽 대형 TV 3대에서 생중계된 시위를 지켜보고 있다. 그중 낯익은 사람이 보인다. 대통령이다. 그리곤 영상을 찍던 본인을 비춘다. 대통령의 아들 트럼프 주니어다. 춤을 추던 여성은 그의 여자친구 킴벌리 길포일이다. 트럼프 주니어가 입을 연다. “개봉박두다. 지켜봐 달라. 생중계하겠다. 대단할 것.” 2분짜리 동영상은 별 문제없어 보이지만 촬영 날짜와 장소를 알고 나면 충격적이다. 영상은 연방의사당이 유린당한 6일 찍었다. 장소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운집한 워싱턴 DC 엘립스공원 시위현장이다. 트럼프 주니어의 동영상을 지켜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의사당이 폭도들에게 점거당하고,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동안 트럼프 가족은 난동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축하파티를 열고 있었다”고 분노했다. 댓글들은 온통 날이 서있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난동 교사죄로 기소하라”, “내란(insurrection)의 증거” “이들은 사교 집단” 등등 험한 말들이 폭주했다. 트럼프 지지자들도 댓글로 반박했다. 가짜뉴스라고 한다. 영상은 폭동 발생 전에 시위 현장에서 찍었다고 했다. 폭동을 지켜보며 즐긴 파티가 아니라는 변명이다. 폭동이 발생하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대통령 편을 들었다. 이들은 또 다른 음모론도 제기했다. 이날 난동이 벌어진 이유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의사당 경찰이 시위대에게 의사당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극좌단체 ‘안티파’ 회원들이 트럼프 지지자로 위장해 시위를 격화시켰다고도 한다. 이들은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들은 믿으면서 상식적인 사실들엔 눈을 감고 있다. 대통령의 책임이다. 먼저 이날 대통령이 시위현장에 간 것 자체가 잘못이다.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다. 지지층만을 위한 행사에 참석한 명분을 얻으려 했다면 반대하는 인종차별 시위현장에도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는 ‘BLM’ 시위자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두 번째 잘못은 선동 연설이다. 대통령의 발언은 이랬다. “우린 절대 대선 패배를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도둑질당한 대선을 누가 인정할 것인가. 우린 침묵하기 않을 것이다. 의사당으로 구국의 행진을 하자.” 대통령의 연설은 불에 기름을 부었다.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수백 명이 의사당으로 진격했다. 총기와 창으로 무장한 채 의사당 벽을 타고, 유리창을 부수고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5명이 죽었다. 만약 연설에서 대통령이 ‘당신들의 아픔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 나라를 위해 승복해야 할 때다.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더라면 최악의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문제의 동영상을 여러 차례 돌려봤다. 볼수록 위화감이 느껴졌다. 노래 가사와 상황들이 뭔가 맞지 않아서다. ‘글로리아’는 사람 이름이다.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여자다. 남자 붙잡기에 집착하는 허영심 가득한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 충고하는 내용이다. 클라이맥스 가사는 이렇다. ‘글로리아, 네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Gloria, don’t you think you’re fallin?)’ 글로리아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 않나. 남자를 ‘국민’으로 바꿔보면 알기 쉽다. 지난 4년간 대통령이 보인 말과 행동들을 압축할 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었다. 이젠 찾은듯하다. 글로리아다. 정구현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1-01-10

[스토리 In] 거꾸로 걸린 성조기

국기는 거꾸로 섰다. 지난달 베터런스데이 즈음이다. 한 식당에 걸린 성조기는 위 아래가 뒤집혀있었다. 식당 주인은 필리핀계다.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알려줬다. 식당 주인은 일부러 그렇게 걸었다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한 듯 답변은 각본 같았다. “나라가 위기다. 대선이 끝난 지 1주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당선인이 2명이다. 서로 대통령이라고 한다. 모두에게 정신차리라 경고하고 싶었다.” 성조기를 거꾸로 걸면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뜻이란다. SOS 신호다. 미국이 조난상태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거꾸로 걸린 성조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였다. 목숨 바쳐 지킨 국가의 가치가 뒤집혔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코끝 찡하게 해준 국기가 지난 4년간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됐다고 개탄스러워했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특정 집단은 MAGA다. ‘Make Great America Again’의 약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다. 유세현장에서 성조기는 MAGA가 적힌 빨간모자와 한 세트를 이뤘다. 때론 극우단체들과도 어울렸다. 출퇴근길 도로 위에선 부자연스럽게 크게 만들어진 성조기 스티커가 붙은 차들이 늘어났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이 반복됐고 어느 틈엔가 성조기는 대통령 지지자들의 표식으로 굳어졌다. ‘서로 다른 애국’이라 받아들이는 쪽도 있었다. 미국 역사에서 성조기가 정치적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 때 성조기는 참전 반대의 표식이었다. 1984년 대선 당시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반대한 그레고리 존슨이 성조기를 불태우면서 헌법 개정 움직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른 애국들이 서로 총질까지 해대는 국가적 분열을 낳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징조는 대통령의 유세현장에서 발견됐다. 성조기 옆에 걸렸던 또 다른 깃발은 국기가 대통령의 깃발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깃발엔 ‘Don’t tread on Trump'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트럼프를 밟지 말라'는 뜻이다. 성조기를 밟으면 국가 모독인 것처럼 트럼프를 반대하면 애국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MAGA가 성조기를 흔드는 바람이 거셀수록 그 반대쪽에 선 사람들은 점점 성조기에서 멀어졌다. 트럼프 지지자로 오해받기 싫어서다. 일부 극진보주의자들은 트럼프 정권 아래에서는 성조기와 나치 깃발, 인종차별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가 같은 뜻이라고까지 폄훼하기도 했다. 사회학자들은 성조기의 의미가 트럼프 정권을 기준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UC샌디에이고의 존 에번스 사회학 교수는 “성조기가 정반대 의미로 해석되는 시대”라면서 “종전의 포용적 민주주의(inclusive democracy)의 상징과 현재의 배타적인 국수주의(exclusive nationalism)”라고 했다. '우리'로 묶어주던 깃발이 '그들'로 나누는 데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적 신념과 상관없이 성조기에는 변하지 말아야 할 의미가 있다. 성조기는 한문으로 별 성(星), 가지 조(條), 깃발 기(旗)를 쓴다. 영어로는 'Stars and Stripes'이다. 별 50개와 줄 13개를 뜻한다. 현재의 50개 주와 독립선언 당시 식민지였던 13개 주다. 주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를 연방이라는 틀에 담은 것이 성조기다. 27번 모양이 바뀌긴 했지만 20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하나된 미국을 뜻했다. 특정 개인이 반드시 이끌어야만 하는 미국이 아니다. 대선 한달이 지났다. 이제 곧 새로운 4년이 시작된다. 조 바이든 당선인의 일부 지지자들은 대선 승리로 성조기가 본래 의미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 역시 MAGA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식당 앞 국기는 아직도 거꾸로다.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email protected]

2020-12-05

[스토리 In] 스무살 선거 자원봉사자의 ‘정치’

그는 스무살이라서 부끄러워했다. 3일 LA한인타운 투표소에서 만난 백인 대학생이다. 이름은 잭이라고 했다. 한인 후보 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단다. 앳된 얼굴의 그는 이번이 첫 대통령 선거 참여라고 했다. 이것저것 물었다. 어린 철학이 듣고 싶었고, 어른의 철학도 훈계하고 싶었다. 투표란 이런 거라는. 질문마다 그는 아직 잘 모른다고 수줍어했다. 쭈뼛쭈뼛 말을 이어가던 그가 안쓰러워 그만 놓아줬다. 10분 뒤, 투표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잭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건 채 그를 잠시 지켜봤다. 가만 보니 그는 아까 만난 숫기없는 스무 살이 아니었다. 투표소는 한가했는데 그는 바빴다. OOO 후보를 지지한다는 푯말 앞에 혼자 서 있던 그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누군가 투표장 앞을 지나갈 때마다 수줍음이라곤 없었다. “투표하러 오셨나요?”, “오늘 꼭 투표하세요.” 불과 10분새 수십명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직 오전시간인데도 ‘OOO 후보를 지지합니다’ 문구가 적힌 그의 티셔츠는 군데군데 땀으로 젖었다. 시동을 끄고 다시 다가갔다. 신념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행동이고 말이었다. 스무살 어린 철학을 반드시 들어야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첫 문답부터 허를 찌른다. -상대후보의 단점은 뭔가. “전 상대후보 개인을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제가 지지하는 후보가 좋은 점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이것 봐라?’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기분은 좋다. 서로 원색적인 비난만 했던 이번 대선 TV토론에서 듣지 못한 지극히 상식적인 선거 캠페인이래서다. 문답은 계속된다. -지지하는 후보의 장점이 무엇인데. “LA 토박이라서 LA를 가장 잘 알고요.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힘없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입장을 잘 압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분 덕에 큰 도움을 받았어요.” -무슨 도움을 받았나. “그의 지역구에 살았던 덕에 미국 국무부에서 지원하는 한국어 무료수업의 기회를 얻었죠. 한국에 6개월간 가서 체류하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어요. 그래서 한국과 미국을 잇는 정치인이 되고 싶은 꿈을 꾸게 됐어요.” 그말을 하고는 한국어를 하기 시작했다. 한인타운 투표소에서 만난 백인 청년 자원봉사자가 말이다. 갈수록 놀라운 스무살이다. 투표소의 자원봉사자 25명 중 한인은 2명밖에 없다. 그중 한 명은 2세라 한국어가 다소 서툴다. 그와 우리말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길 바라나. “누군지는 말할 수 없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지는 말할 수 있어요. 정치인은 시민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해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 동네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더 안전하게 해줘야 하죠. 더 많은 사람들이 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서 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길 바라요.” -그래도 지지하는 후보를 말해줄 수 있나. “음…. 4년 전 대선이 끝나고 실망스럽고 무서워서 친구들과 엉엉 울었어요. 새 대통령이 제 불체자 친구들을 추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4년 뒤 선거에 꼭 투표하겠다고요.”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제 바로 옆에 상대후보 지지 텐트가 있어요. 서로 지지하는 후보는 다르지만 자원봉사자들끼리 서로 존중합니다. 룰을 따르죠. 그런데 투표소에 온 어른들은 그렇지 않아요. 좋아하는 후보가 다르다고 서로 욕해요. 또 룰도 지키지 않죠. 누가 당선되는지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자부심 아닐까요.” 2020년 두 동강난 미국, LA한인타운 투표소 앞에서 만난 스무살 어린 신념은 어리지 않았다. 어른이라서 부끄러웠다. 정구현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1-03

[스토리 In] “제발 그만 좀 싸우세요”

마지막 질문은 허를 찔렀다. “뉴스마다 온통 공화당과 민주당이 싸우는 이야기뿐입니다. 또 시민들끼리 싸우는 소식만 들립니다. 대선 토론에서도 두 후보 간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만 했죠.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요?” 7일 밤 유타에서 열린 부통령 후보 토론회의 승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카말라 해리스 후보도 아니었다. 5800만 명이 지켜본 이날 토론의 대미를 장식한 질문자였다. 사회자 수전 페이지는 유타주 스프링빌 주니어하이의 8학년생인 브레클린 브라운의 질문을 대신 읽었다. 부통령 토론에 앞서 유타주 대선토론위원회와 주교육위원회가 개최한 부통령 후보 토론회 질문 콘테스트에서 700명 중 1위로 뽑힌 질문이다. 이날 토론회 기획진의 의도와 선택이 무릎을 치게했던 순간이다. 소녀의 원초적 궁금증은 질문이라기보단 꾸짖음에 가깝다. ‘어른 노릇 제대로 하라’는 소녀의 충고는 두 후보뿐만 아니라 토론을 지켜본 어른 중 한 명으로 낯이 뜨겁기까지 했다. 소녀는 사이좋게 지내라는 표현을 ‘get along’이라고 썼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학교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어른들이 밥 먹듯이 하는 잔소리를 거꾸로 어른들에게 던진 셈이다. 소녀의 질책은 계속된다. “지금 미국의 수도는 화합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나쁜 사례의 도시로 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어떤 쪽에 서있든 다들 자기 말을 들어주기만 바랄 뿐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이해하려하지 않습니다.” 백악관, 의회에 출입하는 어떤 기자들도 꺼내지 못한 냉정한 비판이다. 대통령의 실책만 지적하고 잘했다 칭찬하지 않는 언론도 문제지만 대통령의 실책은 지적하지 않고 잘했다 칭찬만 하는 언론도 문제다. 그 중간에서 국민은 진실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거나 믿고 싶은 것만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곡이고 호도다. 소녀는 해결책을 숙제와 함께 던졌다. “누군가 이런 말싸움과 분노의 악순환을 깨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변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가가 양분되는 것을 막는 책임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두 후보님들이 모범을 보이신다면 모든 불화가 화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보님들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들은 어떻게 나라를 화합하고 치유하실 수 있나요?” 앞서 85분간 다름을 놓고 싸웠던 두 후보는 아마 가슴 한켠에서 아차 싶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상대가 잘못하고 있다는 손가락질이 대부분이었던 탓이다. 민주당 후보는 현 정부의 코로나 대응 실책이라는 ‘과거’에 대한 지적에만 매달렸고, 현 정부의 넘버 2는 좌익으로 치우칠 수 있는 ‘미래’를 경고하기 바빴다. 무엇보다 러닝메이트로서 차기 대통령 후보가 ‘통 큰 지도자’임을 부각했어야 했다는 때늦은 후회도 들었을지 모른다. 이전 1차 토론 때 마치 유치원생들처럼 싸우던 두 대통령 후보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옳았을지 모른다. 또 국민을 어떻게 화합할 건지, 어떻게 '등따시고 배부르게' 할 건지, 국가적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건지 말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들었을지 모른다. 소녀의 질문은 보수와 진보, 백인과 유색인종, 기득권과 소외계층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우린 원래 하나의 국민이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두 후보가 이번 토론에서 얻어야 할 것은 ‘내가 더 잘했다’는 평가가 아니다. 공화, 민주 이전에 국민을 위한 정치가 우선돼야 한다는 본질적 고민이다. 소녀의 물음에 대한 두 후보의 대답에는 안타깝게도 그 고민이 담겨있지 않았다. 펜스 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선거가 끝나면 우린 미국 국민으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 답변은 허상처럼 들렸다. 정구현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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